기고 링크: 동아일보 | 금요칼럼
갈등과 불신의 정도가 심상치 않다. 각종 의혹사건과 여권(與圈) 내부의 불협화음이 불거지면서 정권에 대한 신뢰는 추락하고 국민의 불안감은 더욱 깊어간다. 정책의 수립과 집행 시스템에 이상 징후가 나타나면서 정책의 실효성과 지속성이 의심스러울 정도다. ‘총체적 난국’이라는 상황 인식은 정치권보다 국민들 마음속에 더 크게 자리 잡고 있다.
갈등과 불신이 심각해지면 종종 ‘공동체’ 담론이 등장한다. 노무현 대통령은 현충일 추념식에서 “가장 중요한 숙제는 공동체적 통합을 이루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요컨대 불균형을 해소해 통합을 달성하자는 요청이다. 최근의 정책 혼선과 갈등 표출을 염두에 두고 타협과 양보를 끌어내기 위해 공동체의식에 호소한 것으로 이해된다. 한편 한나라당은 ‘공동체 자유주의’를 새로운 이념으로 제안했다. 자유주의 시장경제를 발전시키면서 동시에 소외계층을 배려한다는 것이다. 1980년대 미국의 ‘신우파’가 신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를 두 축으로 삼았던 것과 유사한 구상이다.
‘공동체’는 동서고금의 정치적 이상(理想)이다. 이해타산적인 메마른 합리성이 아닌 정서적 유대와 귀속감, 상호의존과 통합, 개인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공동체적 의무감이 매력의 근원이다. 역사적으로 공동체를 강조한 대표적 사조(思潮)는 자본주의의 폐해에 관심을 기울였던 보수주의와 사회주의다. 보수주의자들은 천박한 개인주의와 무질서를 개탄하면서 위계와 권위가 살아있던 과거 공동체를 동경한다. 그들은 공동체의 가치관을 복원하기 위해 전통과 종교의 힘에 의존하기도 한다.
이에 반해 사회주의자들은 자본주의적 소외와 불평등 구조가 사라진 미래의 이상향을 진정한 공동체로 묘사한다. 그들에게 과거는 비인간적인 억압의 시대이며, 진정한 역사는 혁명을 기점으로 시작된다. 새롭게 창조될 공동체에서는 필요에 따라 분배가 이루어지고 평등한 동지들 간의 유대가 정의(正義) 실현의 토대다. 사회주의자들의 ‘상상의 공동체’는 항상 미래에 존재한다. 그러나 그 실현 가능성은 역사 속에서 소진돼 버렸다.
과거의 공동체도 미래의 공동체도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은 아니다. 우리는 ‘공동체’가 아닌 자유주의적 ‘이익사회’에 살고 있고, 그 속에서 바람직한 가치를 살리면서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 물론 갈등을 넘어선 공동체가 갖는 매력을 무시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사회 곳곳에 상존하는 이익 갈등이 엄연한 현실이다.
이익사회에서는 무엇보다 합리성과 능력, 그리고 신뢰가 중요하다. 개인, 기업, 정부 모두 이 기준에 의거해 평가받는다. ‘합리성’은 각 영역의 자율성 보장과 비효율적 관행의 타파를 의미한다. 정치와 경제의 분리, 부패 척결, 투명성 제고 등은 합리성을 높이기 위한 방안들이다. 대화와 절차를 중시하는 태도도 합리성의 한 부분이다. 또한 합리성은 도덕적 정당성의 기초이기도 하다.
‘능력’은 점점 복잡해지는 현대사회에서 그 중요성이 더욱 크다. 개인과 기업은 경쟁력을 길러야만 성공할 수 있다. 정부는 정확한 상황판단과 정책결정을 위한 정보력과 전문성, 그리고 갈등조정과 설득의 능력을 갖춰야 한다. 아마추어 정치는 한편으로 시민의 참여 증대에 기여하지만 아마추어 행정은 국가를 혼란에 빠뜨린다.
‘신뢰’는 공동체적 유대와는 다르다. 신뢰는 절차와 거래비용을 최소화하는 방편이다. 법과 규칙, 제도에 대한 존중이 신뢰 형성의 기본이며 그렇게 쌓인 신뢰를 통해 사회구성원들은 안정되고 예측 가능한 상호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
현실 문제를 ‘미래 공동체’의 관점에서 다루는 것은 위험하다. 불균형을 시정하는 과정에서 저항에 따른 혼란은 불가피하다는 상황 인식, 그리고 혼란을 공동체의식에 호소함으로써 극복하려는 시도는 사태를 더욱 악화시킬 뿐이다. 이익 갈등을 근본적으로 해소하려 하기보다는 불완전하나마 어느 정도 타당한 균형을 점진적으로 모색하는 것이 자유민주주의 정부의 역할이자 능력이다. 장밋빛 공동체의 수사(修辭)보다는 합리성과 능력, 신뢰의 차원에서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