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th of February, 2018

왜 지금 다시 '느린 민주주의'인가

유홍림
유홍림 정치외교학부 교수 / 전 사회과학대학장


기고 링크: 머니투데이 | 인터뷰

머니투데이 인터뷰

들끓는 ‘심층’ 위에 단단한 ‘표층’이 있다. 이 표층-심층의 개념은 철학과 종교를 넘어 우리 사회의 거의 모든 영역에 적용 가능하다. 심층은 열망, 표층은 현실이다. 그리고 정치야말로 이 표층-심층 구도로 설명하기에 가장 적합하다.

2016년 겨울 타오른 촛불은 심층의 정치가 표층의 정치판을 새로 짜게 만들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들끓던 심층은 ‘원래 여긴 표층의 영역’이라는 듯 가라앉았다. 표층의 주류들은 여야의 자리만 맞바꿨을 뿐 여전히 그곳에 그대로 남았다.

유홍림 서울대 교수(정치외교학)는 논문 ‘시민참여 토의정치의 제도화’(김주형 공저)에서 이런 구도의 한계를 지적한다. 그는 “그간의 민주화 과정을 통해 많은 제도 개선이 이뤄졌으나 정치적 소외는 여전히 극복되지 못했다”며 “시민의 정치참여는 선거에 국한되고 일상 차원에서 시민의 정치적 효능감은 낮은 수준에 머무르고 있는 게 현실”이라고 진단했다.

‘국민주권’을 체험할 기회는 겨우 수십년에 한번, 광장의 정치를 통해서만 주어진다. 광장에 모였던 시민이 집으로 돌아가고 나면 모든 결정은 다시 정부에 맡겨진다. 이 ‘광장과 정부 사이 간극’이 계속 공백으로 남아 있다고 유 교수는 설명한다.

게다가 양극화된 정치지형이 이 틈을 점점 더 벌려놓는다. 유 교수는 논문에서 △한국의 식민지 경험 △분단과 전쟁 △급속한 산업화와 민주화에 따른 사회 균열 등을 정치 지형 양극화의 원인으로 꼽았다.

명분상으로는 통합이 시도돼 왔지만 사실은 배제와 서열화를 내포하는 ‘사이비 통합’과 ‘양극화’의 경험만 갖고 있다. 틈이 점점 벌어지게 만드는 원심력만 날로 커지고 있다는 게 논문의 설명이다. 1987년 이후 30여년. 헌법의 틀을 새로 쓰려는 이 시점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렇다면 해법은 뭘까. 결국은 시민 참여다. 시민의 정치적 의사를 묶어 이를 정부가 받아들이도록 하려면 어떤 형태의 정치가 필요할까. 논문은 시민이 주체가 되는 ‘토의(deliberative)정치’를 제안한다. 하지만 이 방법은 시간이 걸린다. 토의정치가 말하는 민주주의는 ‘느린 민주주의’다. 대의제를 통해 소수의 정치엘리트와 정부가 정책을 결정해 곧바로 시행하는 ‘빠른 민주주의’의 대척점에 있다.

게다가 아직은 빠른 민주주의가 대세다. 느린 민주주의는 “민주주의는 승패를 다투는 장이고 토론은 문제를 더 풀기 어렵게 만들 뿐”(Clark&Teachout, 2012)이라는 빠른 민주주의의 통념에 정면으로 도전한다.

느린 민주주의를 설명하기 위해 국내외 다양한 사례들 중 가장 쉽게 들 수 있는 예가 바로 ‘신고리5·6호기 공론화위원회’다. 일각에서 숙의민주주의의 새 전형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논문은 일방적 찬사를 거부한다. 시민사회가 아닌 정부가 주도한 공론화인 만큼 의미가 반감된다고 지적한다. 결론은 인정하더라도 과정을 인정하기 어렵다는 거다. 논문은 신고리5·6호기 공론화에 대해 “에너지정책의 큰 틀에 대한 시민적 토론 없이 그저 부담스러운 정책결정을 시민참여단에 미룬 것이라는 지적이 나온다”고 평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과는 있다. 논문은 △숙의과정을 거치며 시민참여단의 의견변화가 관찰됐다는 점 △공사재개 결정에 장기적 에너지수급정책 논의의 필요성을 담아내려 한 점 △직접 과정에 참여한 시민들이 긍정적 평가를 내리는 점 등을 성과로 꼽는다. 토의정치를 통한 느린 민주주의의 주요 개념인 ‘시민사회의 성장’이 이뤄졌다는 거다.

논문은 현재 ‘이해관계 중심’으로 이뤄지고 있는 의사결정이 ‘시민 중심’으로 달라져야 한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시민사회의 정치적 성숙과 성장이 꼭 필요하다. 논문 전반이 가장 중요하게 품고 있는 함의 중 하나다.

유 교수는 논문을 통해 토의정치 실험의 현 상황을 “망망대해에 떠 있는 섬”에 비유했다. 그러나 섬의 수가 늘어나고 서로 연결돼 군도를 형성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정치적 지형도 보다 민주적이고 안전한 형태로 변화될 가능성이 있다.

이를 위해서는 시민이 참여하는 토의정치의 기반을 구축해야 한다. 플랫폼이 필요하다는 거다. 지역공동체의 토론모임이 활성화되고, 지방자치단체 수준에서 이런 토론 결과를 정책에 반영하는 실험이 필요하다.

재원문제도 중요하다. 미국의 경우에도 펀드 부족으로 활동을 마감한 토의정치체가 적잖다. 논문은 정치권과 정부가 토의정치 확산이 결국 국익이 된다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토의정치 수용을 통해 결국 시민의 지지를 확보하는 길을 갈 수 있다. 과정에 대한 간섭이 없는 정부 차원이 재정 지원이 필요하다. 정치지도자와 공직자에 대한 교육, 매스미디어의 활용 등도 빼놓을 수 없는 요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