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링크: 머니투데이 | 인터뷰
‘느린 민주주의’로 대변되는 토의정치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는 유홍림 서울대 교수(정치외교학)는 지난 2일 서울대 내 연구실에서 머니투데이 더(the)300과 만나 “민주주의의 본질은 시민의 관심과 참여”라고 말했다. 그는 “토의정치를 통해 시민들의 정치참여를 이끌어낼 수 있다”고 전제하고 토의정치로 대표되는 ‘느린 민주주의’가 대의민주주의체계 등을 통한 ‘빠른 민주주의’보다 오히려 효율 면에서도 나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촛불이 부른 직접민주주의 바람을 타고 개헌 논의가 본격화됐다.
▶제도로서의 정치가 제 역할을 못하고 부패의 징후를 보일 때 개혁이 화두가 된다. 87년 민주화 이후 화두는 개혁이었다. 시민이 담당해야 할 부분이 있고 정부가 담당해야 할 부분이 있는데 이를 민주적으로 재구성하는 작업이 바로 헌법 개정의 담론이다. 대통령 직선제와 지방자치제 등 성과가 있었지만 정치에 대한 불만과 불신은 여전하다. 정권교체 이후 몇몇 정책이나 입법만으로 촛불의 정신과 광장의 열정이 해소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문제가 있다.
-어떤 노력이 뒤따라야 할까.
▶시민들 스스로 담당해야 할 부분이 있다. 국민들이 보기에 구태 정치가 계속되고 있다. 이게 개헌 문제로 이어진다. 광장의 정치, 열정의 정치는 근본적으로 제도의 정치를 대체할 수는 없다. 뜨거운 용암 위에서만 살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국 정치는 선거 캠페인의 연속이다. 선거가 끝나면 그 다음 선거로 간다. 이런 맥락에선 타협이 불가능하다. 정치가 대결과 정쟁, 승패의 연속이라고 봐서는 안 된다. 전국민적 합의와 열망을 토론을 거쳐 정제된 형태로 담아야 한다. 하지만 그런 노력이 없다.
-토의정치가 대안인가.
▶토의정치는 현대 민주주의 이론 중에서 실천 부문에서 상당히 주목받고 확산돼 왔다. 기존의 대의민주주의나 대표민주주의가 갖는 근본적 문제가 시민과 정부의 괴리다. 이 불만이 시발점이다. 이걸 극복하기 위한 고민과 실험, 실천의 집합이 토의정치다. 아직은 진행형인 하나의 과정이다. 다양한 민주주의 실험을 하나로 포괄하는 개념이다. 숙의보다 훨씬 집중적인 심의체까지 포함하는, 연결의 정치형태가 토의정치다.
-신고리5~6호기 공론화위원회가 사례다.
▶그렇다. 그 역시 하나의 실험이었다. 다만 이해를 잘 해야 한다. 한 마리의 제비가 날아왔다 해서 꼭 봄을 알리는 제비인 건 아니다. 계절을 잘못 알고 날아온 제비일수도 있다. 신고리 공론화위는 한국 사회에서 토의정치의 가능성을 보다 확대할 수 있는 기회일 수 있었다. 단지 건설 중단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 에너지정책 논의의 출발점이 됐어야 했다. 그러나 거기까지 이르지 못하고 그 전에 그쳐버렸다. ‘시즌 2’가 전개되지 못해 아쉽다.
-복수의 공론화위를 동시 가동하는 형태가 적합한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정부주도의 공론화위를 중심으로 토론정치를 실현할 수 있다고 생각들 하는데 나는 이점에 대해 비판적인 거다. 한국에서 시민단체의 시민운동이 민주화 바람을 타고 활성화될 당시 YS(김영삼) 정권에서 했던 게 정부가 지원하고 포섭하는 거였다. YS정권에 의해 한국의 시민사회, 시민단체의 정치참여가 상당히 왜곡됐다. 토의를 통한 입법과 정책수립 과정이 다시 정부주도의 공론화를 통해 이끌어진다면 YS때의 결과가 또 반복되지 않을까.
-느린 민주주의는 효율 문제가 있다.
▶신고리를 보자. 정부가 건설 중단부터 해놓고 재개할지 말지만 고민했다. 에너지정책 전반에 대해 논의했어야 했다. 그런데 갑자기 중단시키면서 결국 건설을 재개하는데 비용은 더 들고 에너지정책 전반에 대해서는 논의도 하지 못했다. 현대사회는 대부분의 정책이 그렇게 짧은 시간 내 일시적으로 결정하기 어렵다. 다분화되고 이해관계가 복잡해졌기 때문이다. 에너지정책 면에서는 오히려 효율이 떨어졌다고 본다.
-토의정치 결과물을 어떻게 정부에 전달하나.
▶토의정치는 다양한 네트워킹을 통해 여론의 질을 향상시키는 개념이다. 이런 의견수렴의 과정을 거치고 나면 권고안이 나오는데 이는 여론조사 정도로 대표되는 기존 조사보다 훨씬 강한 영향력을 갖게 된다. 외국에서는 지방정부가 이런 토의정치 결과를 정책에 직접 반영하는 사례가 많다. 여론조사와는 다른 영향력을 갖는다. 이는 시민들이 시민의식을 스스로 향상시키려 하는 노력으로 이어진다. 건전한 시민공동체 수립 노력을 개개인이 해야 한다.
-정치권에서 수용할까.
▶정치권은 아마 안 하려고 할 거다. 개헌안에 시민참여를 못 박자는 내용을 선뜻 받아들이려 하지 않을 거다. 그러나 유권자 입장에서 볼 때 지금의 개헌은 30여년 민주화 과정을 새로운 단계로 성숙시키는 중요한 계기다. 복잡한 정치적 이해관계에만 맡길 수는 없다. 어떤 형태로든 시민의 판단과 공적 판단을 조화시키고 충분한 토의가 이뤄지는 과정이 필요하다. 이게 개헌에 반영돼야 한다는 문제제기가 사회적으로 이뤄지면 정치권에 압박으로 작용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