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링크: 중앙일보 | 유홍림의 퍼스펙티브
민주주의 위기 벗어날 해법은
한국 사회가 겪고 있는 갈등은 심각하다. 굴곡의 역사에 뿌리를 둔 반감의 골이 깊고, 공정을 둘러싼 계층과 세대 갈등은 증폭하고 있다. 통합을 강조하지만, 배제와 양극화의 경험이 현실이다. 서로를 인정하는 경쟁은 좋은 법과 제도를 만들지만, 적대적 갈등은 모두를 파국에 이르게 한다.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했다는 경고는 더는 자극적이지 않다. 정치 불신과 정부 실패, 포퓰리즘이 새로운 현상도 아니다. 국가 흥망의 역사를 보면 위기는 불가피하고, 위기 극복의 오래된 처방은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이 대변하듯 혁신을 이끄는 강한 리더십이다. 그런데 ‘혁신 군주’가 혜성과 같이 나타나길 기대하는 것이 현실적 처방인가?
대선 정국에서도 정치권과 시민 사이의 거리는 멀다. 정치인들은 상호 비방과 표 계산에 여념이 없고, 유권자들은 진영 논리 캠페인에 휩쓸려 분열과 냉소의 늪에 빠져있다. 정치인들에게 민의에 귀 기울이라고 요구만 할 것이 아니라, 시민들이 직접 목소리를 모아낼 수 있는 공간과 역량을 확보해야 ‘민주주의 위기’ 담론에서 벗어날 수 있다.
여론 조사 넘어 공론 형성 필요
사회 갈등이 심각한 상황에서 투표와 여론 조사에만 의존한 다수결의 의사 결정은 이성적 공론의 장을 무력하게 만든다. 승패를 가르는 형태로 법과 정책이 결정되면, 공동선이 아닌 당파성을 앞세우는 선전과 투쟁이 정치의 장을 지배한다. 책임에 둔감해진 대의제와 개별 선호를 집약하는 정치 과정을 쇄신해야 한다. 정부와 시민 사이의 거리를 줄이고, 갈라진 여론을 넘어 공론을 형성하려는 활동과 제도가 ‘민주적 혁신’이다.
세계 곳곳에서 전개되는 민주적 혁신은 소규모 시민참여단에서 전국적 포럼네트워크 구축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사실 정보 제공과 선택지의 장단점에 대한 균형 잡힌 평가, 공정한 토의 절차로 구성되는 민주적 혁신은 법과 정책에 대한 신뢰와 안정성을 높인다. 나아가 민주주의의 보루인 건전한 시민공동체와 시민문화를 육성하는 데도 기여한다.
정치권이 시민의 요구대로 정치를 개혁하고 헌법을 개정할 수 있을까? 캐나다·네덜란드·아일랜드에서는 ‘시민의회’가 선거제 개혁과 헌법 개정에서 주도적 역할을 담당했다. 캐나다에서 시민의회는 수개월의 토의를 거쳐 선거제 개혁 권고안을 마련하고, 국민투표에 부쳐질 선택지를 결정했다. 경제위기 이후 고조된 헌법 개혁 요구에 부응해 시민의회를 운영한 아일랜드에서는 혁신적 권고안 일부가 국민투표를 거쳐 헌법 개정으로 이어졌다.
미국 시민배심원, 유럽 시민발의제
시민이 정책과 공직 후보자를 제대로 평가하기 위해서는 관계자들과의 충분한 질의응답과 조사를 통해 고급 정보를 얻어야 한다. 이 목적에 맞게 모집단의 축소판으로 고안된 ‘시민배심원’은 미국에서 다양한 정책 토의에 적용되었으며, 선거에서 후보자 평가를 수행해 유권자들에게 유용한 정보를 제공하기도 했다.
유럽의 ‘시민발의제’는 온라인 플랫폼을 통해 시민들이 숨은 의제를 공론화하고, 입법 과정과 연계하여 혁신적 입법을 끌어낸다. ‘계획위원회’와 ‘합의 회의’ 모델도 여러 국가에서 시행되어왔다. 시민참여단은 전문가와 이해당사자들로부터 다양한 정보를 얻고 토의를 진행한 후, 정책 입안과 결정에 반영되는 시민보고서를 작성한다.
‘공론조사’도 공적 의사결정의 질을 향상한다. 그동안 30여개 국가에서 120여 차례 시행한 공론조사는 훈련된 사회자가 진행하는 소그룹토론, 전문가와의 질의응답을 위한 전체 회의, 그리고 최종 의견조사가 핵심 절차다. 결과 분석에 따르면 참여자들은 토의 과정을 거치면서 자신의 의견과 선호를 실질적으로 전환하고, 이후 공적인 일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참여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시민이 자발적으로 조직해서 전국적 포럼네트워크로 발전해온 미국의 ‘국가이슈포럼’은 시민 포럼을 구축하려는 여러 국가에 모범이 되고 있다. 비당파적인 포럼 조직기구와 재단은 매년 주요 현안에 대한 객관적이고 균형 잡힌 토의 자료와 사회자 교육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대규모 포럼을 조직하는 협력단체뿐만 아니라 소규모 토론그룹도 지원한다. 포럼 참여자는 대안들을 검토하면서 시야를 넓히고, 문제 해결을 위해 감수해야 하는 손익을 저울질하면서 균형감각을 키운다.
또 미국 전역에서 조직되었던 ‘21세기 타운미팅’은 형식적인 공청회의 한계를 극복하는 데 기여했다. 대면 토론과 온라인 토론을 혁신적으로 결합한 21세기 타운미팅에서 수천 명의 시민은 하루 동안에 현안을 토의하고 해결 방안을 도출했다. 대표적으로 사회보장제도와 건강보험 개혁, 지역 재건 계획 수립, 균형 재정과 경제 회복을 다룬 시민 포럼에서 의미 있는 성과를 거뒀다.
공론화위원회와 온라인청원의 한계
한국에서 진행된 민주적 혁신은 참여예산제, 공론화위원회, 온라인 국민청원 정도다. 참여예산제를 대표하는 브라질의 포르투 알레그레의 사례는 지방정부의 예산과 정책에 대한 시민의 광범한 결정권이 인정되어 사회 개혁이 이루어진 경우다. 한국에서도 참여예산제는 정부와 지자체 재정 운영의 투명성과 접근 가능성, 그리고 예산의 민주적 활용 가능성을 높이는 데 기여한다. 그러나 참여예산의 규모가 전반적으로 미미한 수준이며, 불평등 개선 효과도 불확실하고, 시민 참여의 폭과 방식도 제한적이다.
신고리 5·6호기 공론화위원회와 대입제도개편 공론화위원회는 국가적 의제를 시민 참여 숙의 과정을 통해 해결하려는 의미 있는 시도로서 많은 관심을 받았다. 그러나 민감한 정치적 사안을 정부가 책임 있게 추진하지 않고, 시민을 동원한 일회성 행사를 통해 책임을 회피하려 했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또 의제의 범위와 적절성, 정부 정책 결정과의 연계성 등이 충분히 검토되지 않았고, 장기적인 에너지정책과 교육정책에 대한 전문가와 정책 결정자, 시민이 함께 참여하는 후속 포럼을 활성화하지도 못했다.
지난 7월 말까지 청와대 국민청원에는 104만여 건의 청원이 올라왔고, 2억 명이 넘는 국민이 동의에 참여했다. 온라인청원은 텔레그램 n번방 사건, 윤창호법, 소방공무원 국가직 전환 등의 사안들이 공론화되어 입법으로 이어지는 데 기여했다. 그러나 입법부와 사법부 관할 사안이 청와대로 향하고, 일부 청원은 토론과 숙의보다는 사회 갈등을 부추겼다.
현재 민주적 혁신의 실험은 망망대해에 떠 있는 섬에 비유될 수 있다. 그러나 섬들의 수가 늘어나고 서로 연결되어 군도를 형성한다면, 정치 지형이 보다 합리적이고 안전해질 것이다. 앞서 살펴본 해외 사례들은 시민참여포럼이 섬세하게 설계되고 정교하게, 지속해서 운영될 경우 상당한 성과를 거둘 수 있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
정치 과정 쇄신하는 시민포럼네트워크
정치 과정을 쇄신하는 기반으로 요식적인 단발성 시민포럼이 아니라 ‘국가이슈포럼’ 형태의 전국적 포럼네트워크를 구축해야 한다. 밑으로부터 학습과 토론모임을 활성화하고, 정책 결정 과정에 다양한 혁신의 실험을 도입해야 한다. 나아가 시민포럼을 전국적으로 조직하고 운영할 수 있는 비당파적 기관들의 네트워크는 사회 갈등을 줄이고 산적한 과제를 푸는 데 크게 기여할 것이다.
시민포럼네트워크는 대학과 언론, 비영리재단, 정부가 협력해서 구축할 수 있다. 특히 모든 분야의 전문가와 미래세대가 모여 진리와 공론을 추구하는 대학의 역할이 중요하다. 대학이 중심이 된 포럼네트워크 총괄기구는 객관적 사실 정보와 연구 결과에 기초한 현안별 토의 자료를 제작 배포하고, 전문가와 시민, 정책 결정자가 참여하는 토의 절차를 마련하며, 토론 사회자를 양성하는 기능을 담당해야 한다. 시민의회, 시민발의, 공론조사, 시민배심원 등은 시민포럼네트워크를 기반으로 운영될 때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다.
민주적 혁신은 선거 캠페인과 국정 운영의 괴리를 줄이고, 정쟁에서 벗어나 국정 운영의 동반자 관계를 형성하는 과정과 제도이기도 하다. 비타협적 사고방식이 지속하는 한 공동선에 입각한 입법과 정책 수립은 불가능하다. 경쟁과 타협을 순환적으로 결합하기 위해서는 시민이 주도해서 만든 공론을 정치인들에게 제시하고 타협을 요구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