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링크: 중앙일보 | 유홍림의 퍼스펙티브
세계 경제 선도 국가들이 날로 치열해지는 혁신 경쟁에서 앞서기 위해 온갖 노력을 하고 있다. 혁신 없이 단순히 투자 규모를 늘리는 것만으로는 국가 경쟁력과 양질의 일자리, 안정적 복지 체제를 유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
혁신은 뛰어난 몇몇 사람의 발명이나 아이디어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혁신은 아이디어 창안부터 상품·서비스 생산에 이르는 모든 단계에서 효율성을 높이는 조정을 거쳐야 가능하다. 보스턴이나 실리콘밸리 사례들이 보여주듯 실험실과 응용 숍들, 시제품을 만드는 엔지니어 숍들 사이의 전방위적 토론과 협력 속에서 혁신이 이루어진다. 혁신이 집단적 협력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행위 주체들 사이에 돈독한 신뢰를 북돋우는 혁신 생태계를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의 문제는 중요할 수밖에 없다.
많은 경우 혁신적 아이디어는 정보 부족이나 구태의연한 관행, 각자의 지나친 이기심으로 인해 좌초되곤 한다. 그래서 자유로이 혁신을 추구하도록 장려하는 것과 함께, 혁신적 아이디어들을 연계하는 조율이 필요하다. 특히 국가적 차원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서는 대학, 전문 연구소, 기업, 정부 사이의 효율적인 협력 거버넌스를 구축해야 한다. 활력 넘치는 혁신 경제를 만들고자 한다면 먼저 산-학-관 플랫폼부터 혁신적으로 다양하게 구성할 수 있어야 한다.
선진국들의 혁신 생태계 변화
우리는 ‘집단적 혁신’을 어떻게 이룰 것인가? 권형기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가 『세계화와 국민경제의 재구성』에서 시도하듯, 격화되는 글로벌 경쟁 속에서 선진국들이 어떻게 혁신 체제를 부단히 업그레이드하는지 면밀히 관찰할 필요가 있다.
미국이 기초연구와 근원적 발명에서 강점을 보인다면, 독일과 일본은 응용과학과 산업적 연계에서 특장점을 지닌다. 미국에서는 뛰어난 대학과 연방 연구소들에 의한 새로운 발견과, 독자적 아이디어로부터 탄생하는 스타트업이 혁신 체제의 중심이다. 독일의 경우는 기존 기술을 변화시키거나 다른 용도에 적용하여 새로운 사업을 창출하는 데 강점을 보인다. 산업체와 대학 간 연계성이 약한 편이었던 일본은 10여 년 전부터 대학과 기업 사이에 개방적·포괄적인 협력 플랫폼들을 만들어 내는 데 박차를 가하고 있다.
미국 혁신 체제의 토대는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인재들이 모여드는 대학들과, 이들로부터 성장하는 벤처기업, 그리고 풍부한 벤처 자본이다. 그러나 수전 버거 MIT 교수나 하버드대 조사에 따르면 미국의 혁신 스타트업들이 실리콘밸리와 보스턴 등에서 많이 탄생하지만, 신기술 상업화는 주로 해외에서 이루어져 왔다. 이로 인해 미국 내 생산과 혁신생태계 사이의 선순환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오바마 행정부 이래 미국은 독일의 프라운호퍼 연구소 모델에 따라 응용과학 연구 성과와 산업 간 연계를 강화하고 있다. 대표적인 예가 산-학-관 대표들로 구성된 ‘선진 제조 파트너십’(AMP) 컨소시엄이다. AMP는 발명부터 생산까지 혁신 전 과정을 미국 내에 완성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여전히 독일보다 제한적이기는 하지만, 미국 정부도 대학과 국내 산업이 보다 긴밀히 연계되도록 노력한다.
산학연 협력 구심점 독일 프라운호퍼 연구소
독일 혁신 체제에서 주목할 점은 정부가 혁신생태계를 육성하기 위해 간접적 방식을 사용하면서도 적극적으로 지원한다는 점이다. 독일은 민간 기업, 사회단체와 협회, 정부 연구소들과 대학들 사이에 긴밀한 협력 체제를 구현하고 있다. 특히 국가 경쟁력 제고를 위해 기업들이 직접 활용할 수 있는 응용 연구를 주로 수행하는 프라운호퍼 연구소는 대학과 산업체 간 차이를 메우고 협력을 끌어내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이 연구소는 대학들과의 협력을 통해 대학·연구소·학계 전반의 역량을 강화하고, 이러한 플랫폼과 네트워크에서 기업들이 첨단 연구를 진행할 기회를 제공한다. 프라운호퍼 생태계는 생산 영역에 관여하는 것 이외에도 박사과정 학생 등 연구 인력을 키우는 교육 기능도 수행하고 스타트업도 지원하며, 더 나아가 국가 산업정책에 대한 조언자 역할까지 수행한다.
일본은 생산 과정에서 지속적인 혁신을 자랑하는 나라였지만, 정체 상황이 장기화하는 쓰라린 경험도 겪었다. 기존의 협력·조정 체제가 ‘폐쇄적 연결망’에 너무 의존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반성으로부터 2012년 아베 정권 이후 일본은 ‘개방형 혁신 체제’로 전환하고 있다. 이제 일본은 기업·대학과 공공 연구기관, 벤처 자본, 정부가 다양한 상호 교류와 협력을 통해 연구 성과를 높이고 상업화를 달성하는 생태계를 성공적으로 일구고 있다.
도쿄대, 벤처 캐피털 설립해 기업에 투자
전통적으로 일본은 대학·산업 간 연계성이 미약했다. 기업은 내부 연구소 중심의 체제에, 대학은 상아탑에 갇혀 있었다. 그러나 10여 년 전부터 긴밀해지고 있는 대학·기업 협력이 공동 연구 수준을 넘어 조직 간 포괄적 계약을 토대로 지속해서 강화되고 있다. 도쿄대 등 주요 국립대들은 총장 직속으로 ‘산학협창추진본부’ 같은 산학 협력 총괄조직을 신설하여 과감하게 대학 시스템을 개혁하고 있다. 이러한 총괄조직은 기업과의 공동 연구, 벤처 창업과 성장 지원, 법률과 경영 지원 등에서 원스톱 서비스를 구현한다.
이러한 변화에 따라 대학이 기업과의 공동 연구를 통해 조달하는 연구비 규모, 대학의 특허 출연·보유 건수가 대폭 증가하는 추세를 보인다. 그리고 도쿄대는 벤처 캐피털 회사까지 설립하여 5000억원 이상의 자금을 10개 이상의 기업에 투자하고 있고, 최근에는 벤처 인큐베이션을 위한 인프라를 대대적으로 확충했다. 교토대는 이러한 혁신 체제를 더욱 개방적으로 확장하여 국내 기업뿐 아니라 외국 연구기관, 다국적 기업들과의 사업 제휴로까지 발전시키고 있다. 이러한 활력 덕분에 일본의 스타트업 생태계도 엄청난 속도로 성장하고 있다. 로봇 수트를 만드는 사이버딘(Cyberdyne), 스파이더 합성 실크를 만드는 스파이버(Spiber) 등 대학에서 탄생한 혁신 스타트업 수도 급증하고 있다.
이런 변화들은 정부 정책의 혁신적 전환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다. 일본 정부는 일본을 ‘기술 주도 국가’로 탈바꿈시킨다는 목표 아래, 산-학-관으로 이루어지는 개방형 혁신 체제로의 전환을 천명했다. 그리고 대학이 이 생태계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파트너로 발전하도록 ‘연구대학 강화 촉진 사업’을 시행하여 우수 대학에 대규모 보조금을 지원하고 있다. 또 ‘국립대학 법인법’ 개정을 통해 국립대의 자율성을 높이고, 우수 대학에 운영비 교부금 등을 집중 배정하는 ‘지정국립대학법인’ 제도를 도입했다. 일본 정부는 대학과 기업에 다양한 인센티브를 제공하고 각종 제도를 정비함으로써 혁신생태계 구성의 촉진자로서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신뢰 기반 혁신 거버넌스 만들어야
세 국가의 혁신생태계 업그레이드 경험을 잘 살펴보면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가늠할 수 있다. 먼저 선진국들이 대학을 국가경쟁력 강화를 위한 혁신 체제의 가장 중요한 파트너로 삼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정부는 대학과 기업의 협력을 직접 주도하고 관리하는 것이 아니라, 인프라를 제공하고 협력을 촉진하는 후원자의 역할을 수행한다. 대학이 혁신 주도자가 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인센티브 시스템도 제공한다. 이에 상응해서 대학은 기업과의 협력이 활발해지도록 시스템과 운영 방식을 과감하게 바꾼다.
이러한 노력을 통해 구성되는 혁신생태계 주인공은 자율적이고 유연한, 외국 연구기관과 기업까지도 끌어들일 수 있는, 다양한 개방형 융복합 플랫폼들이다. 이러한 플랫폼들은 기업·대학·정부 사이의 소통과 신뢰를 지속해서 강화하고, 이는 다시 더 높은 수준의 창의적 협력으로 이어지는 선순환을 만들어낸다. 우리나라에서도 산학 협력의 혁신적 전환이 이루어지려면 대학을 관리와 통제의 대상으로 생각하는 정부의 태도부터 바뀌어야 하고, 대학도 혁신생태계 중심에 서기 위한 과감한 체질 개선에 나서야 한다. 상호 신뢰의 수준을 높여 자발적 협력을 끌어내는 정치적 역량이 필요한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