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시민 토론·논쟁 없는 한국 민주주의는 위태롭다
유홍림

프로이센의 군사 이론가 클라우제비츠는 『전쟁론』에서 “전쟁은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의 연속이다”고 설파했다. 주어와 술어를 바꾸면 ‘정치는 다른 수단에 의한 전쟁의 연속이다.’ 여기에서 앞 구절의 다른 수단은 폭력이고, 뒤의 다른 수단은 언어 행위다. 정치는 ‘말로 하는 투쟁’이다. 정치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이 하나일 수는 없지만, 민주주의에서 이 명제의 설득력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진영의 집단사고, 사회 양극화 부추긴다
유홍림

선거가 다가오면 음모가 기승을 부리고 선동이 판친다. 시민들은 후보자의 이름을 내걸고 몇몇 캠프로 갈라진다. 온 나라가 열병을 앓듯이 선거가 모든 일상을 삼켜버린다. 그러나 운명이 결정되면 한때 범람했던 강물이 잦아들듯이 폭풍 같은 열정이 조용히 흩어져 버린다. 참으로 놀랍지 않은가?

'자유민주주의'라는 정치언어의 생명력
유홍림

새 정부의 출범을 앞두고도 비난과 대결이 극성이다. 국민통합을 위해 협력하겠다는 여야의 공약은 희미해졌고 이를 바라보는 국민은 착잡함을 넘어 환멸감에 빠졌다. 국민은 헝클어진 실타래를 풀 듯 난해한 과제의 요체를 파악하고 실효성 있는 정책을 마련하기 위해 머리를 맞대는 정치를 갈망한다.

시민 주도로 공론 만들어 정치인들이 수용하게 해야
유홍림

한국 사회가 겪고 있는 갈등은 심각하다. 굴곡의 역사에 뿌리를 둔 반감의 골이 깊고, 공정을 둘러싼 계층과 세대 갈등은 증폭하고 있다. 통합을 강조하지만, 배제와 양극화의 경험이 현실이다. 서로를 인정하는 경쟁은 좋은 법과 제도를 만들지만, 적대적 갈등은 모두를 파국에 이르게 한다.

토의정치가 느리다고? 효율은 나을수도
유홍림

'느린 민주주의'로 대변되는 토의정치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는 유홍림 서울대 교수(정치외교학)는 지난 2일 서울대 내 연구실에서 머니투데이 더(the)300과 만나 "민주주의의 본질은 시민의 관심과 참여"라고 말했다. 그는 "토의정치를 통해 시민들의 정치참여를 이끌어낼 수 있다"고 전제하고 토의정치로 대표되는 '느린 민주주의'가 대의민주주의체계 등을 통한 '빠른 민주주의'보다 오히려 효율 면에서도 나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왜 지금 다시 '느린 민주주의'인가
유홍림

들끓는 '심층' 위에 단단한 '표층'이 있다. 이 표층-심층의 개념은 철학과 종교를 넘어 우리 사회의 거의 모든 영역에 적용 가능하다. 심층은 열망, 표층은 현실이다. 그리고 정치야말로 이 표층-심층 구도로 설명하기에 가장 적합하다.

원시림
유홍림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는 인간의 영혼을 ‘광활한 원시림(原始林)’에 비유했다. 많은 학자들은 이 미지(未知)의 위험한 사냥터에서 산과 계곡을 헤매며 추적과 탐색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러나 영혼을 학문의 형태로 탐구하기 시작한 그리스 시대로부터 2000년 이상 지난 뒤 니체는 말한다. “식자(識者)라 자부하는 우리는 우리 자신을 모른다.”

진정한 정치가
유홍림

소크라테스는 인기 있는 정치가들에 대한 비판으로 아테네 시민을 당혹스럽게 했다. 그는 마라톤 전투의 영웅 밀티아데스, 아테네의 해상 제패를 주도한 테미스토클레스, 그리고 페르시아 전쟁의 승리를 찬란한 문명으로 발전시킨 페리클레스를 ‘거짓 정치가’라고 힐난했다. 이들 중 페리클레스는 아테네의 우월성을 과시하기 위해 웅장한 신전(神殿)을 세우고, 대규모 공공사업을 통해 아테네 시민들의 욕구를 달램으로써 큰 칭송을 한 몸에 받았던 인물이다.